나의 인생 영화
인간의 수명을 100년이라고 길게 보면 나는 이미 절반을 써 버렸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영화를 보았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왔는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있다. '나의 인생영화'라는 주제로 글을 몇 개 뽑으려 하니 뇌리에 박힌 영화들은 손으로 꼽아진다는 것이다. 괜찮은 영화였어 정도의 영화는 무수히 많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인생영화'라는 감투를 씌우려 하니 나 스스로 심사숙고해진다고나 할까? 쉽게 내놓기가 조심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로 꼽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천장지구!
오래도록 함께한 영화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건 고3 수험생 시절의 가장 뜨거웠던 때였다. 무언가에 가득 찌들어있던 10월 어느 날. 천장지구를 상영하던 한 영화관을 나는 호기롭게 혼자서 찾아들어갔다. 그 당시 나의 짧은 인생에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는 없었다. 그리고, 이 강한 첫 만남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나의 추억 속에 깊이 자리 잡아있다.
비디오테이프가 나오던 시절이었는데 중고 테이프를 어찌어찌 구해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보았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 DVD를 구입하여 보기를 이어갔고 이제는 OTT영화로 추억을 이어가고 있다. 한 영화를 이렇게 여러 번 그리고 여러 해를 거쳐가며 본 적이 있었을까? 정말 신기하다. 스토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감흥이 크게 변하는 것도 없는데. 마치 추억의 끈이 조금 멀어졌다 싶으면 소홀했던 여자친구를 위로하듯 잠깐이라도 들여다보고 마는.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
천장지구가 개봉하던 몇 해 전과 후는 홍콩영화의 전성기였다. 지금도 그 시절 영화 제목만 대면 몇 시간짜리 술 안줏거리는 충분하고 영화 주인공 흉내내기는 책갈피 같은 우리들의 추억이다. 크게 두 축으로 누아르 영화빠들은 약간의 선호도가 갈리곤 하는데 하나는 '영웅본색'파, 또 한축은 천장지구이다. 영웅본색은 주인공 주윤발이 큰 형님 같은 아우라로 펼치는 복수극이라면 천장지구는 주인공 유덕화가 충성심 많은 조직원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비극적 로맨스이다.
두 영화가 모두 누아르라는 홍콩 범죄조직을 베이스로 한 영화이지만 지향하는 것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사나이들의 액션을 영웅본색이 표방했다면 결국 비극으로 치닫는 가슴 시린 청춘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가 천장지구이다. 천장지구는 그래서 다소 액션이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스틸 컷처럼 연상되는 CF적 터치를 많이 사용하였다. 하지만 난 천장지구가 개인적으로 더 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소요소 많은 쇼트커트들이 내 기억을 잠식해 버린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들 이야기
시대는 1980년대를 넘어 2000년대로 향하는 초창기. 뭔가 예스러움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시대적 사명감이 느껴지던 시절. 그러나, 세상은 변한 게 없고 내일은 어제의 연속일 뿐인 그저 그런 시대. 그래서, 우리는 현실 속엔 없는 총격씬과 칼부림을 잔인하지만 그렇게 재미있고 호쾌하게 때론 숨죽이고 지켜보았나 보다.
칼부림이 난무하고 유혈이 낭자한 거리,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 가스통에 무참히 가격 당해 흐르는 쌍코피, 웨딩샵을 털어 예복을 맞춰 입고 치르는 성당 앞 예식, 눈앞에서 사라진 애인을 좇아 드레스를 추켜올리고 맨발로 도로 위를 헤매는 애처로운 여인. 모든 장면들이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였고 우리와는 아주 먼 부류의 이야기였다.
영화 속 주인공 유덕화는 사회와 격리된 또 다른 범죄조직이라는 작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평범한 일상의 사람과는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조직 안에서 그는 평범한 일개 구성원에 불가하다. 조직 내 룰에 따르고 함께 열심히 일하며 함께 즐기고 좋은 자리로 오르기 위해 조직원 서로 경쟁하는 모습 등 우리 사회의 맥락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운명처럼 얽히게 된 여주인공과의 첫 만남도 열심히 일하는 과정에서였고 일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는 모습 또한 나의 청춘과 흡사하다. 사실 천장지구는 장르적, 장면적 장치를 두었을 뿐 우리의 마음속을 향해 이야기하는 애절한 러브스토리였다. 끝없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우리들의 청춘 이야기가 바로 천장지구인 것이다.
운명론적 사랑, 운명적인 태생
나는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운명에 관한 것이지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다. 누구에게나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 그래서, 본인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다는 것. 여주인공 오천련과의 운명적인 사랑은 결국 태생적 운명론에 의해 마무리된다. 홍등가의 이모들 손에 자란 유덕화가 홍콩의 재력가 집안의 딸 오천련과 운명적으로 만나고 사랑하지만 그들의 운명적 사랑을 앗아간 것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운명적 태생이었던 것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되어 있던 태생적 환경.
천장지구의 또 다른 재미의 축은 유덕화 동네 형으로 분한 오맹달에 있다. 이 사회에도 끼지 못하고 조직에서도 외면당하는 정체성 없는 새로운 군상을 통해 감독은 무언가 첨언하고 싶은 게 분명 있어 보였다.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존재. 그런 그에게 이 영화의 마지막 사건을 그의 힘으로 마무리짓게 했다는 건 이런 존재에게도 주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천장지구라는 영화 한 편의 인연으로 나는 3년 전 여름 어느 날, 이 영화의 감독 진목승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에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그리고, 6개월 뒤 유덕화 동네 형 오맹달도 세상을 떠났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 영화 속 운명론이 영화 밖으로 연장된 건 아니겠지만 마음이 참 씁쓸했던 기억이었다.
아, 그리고 놓칠 뻔 했다. 이 영화를 더욱 오랜 기억에 있게 했던 건 바로 음악이라는 것. OST 모든 곡이 좋았고 이 글을 쓰는 내내 흥얼거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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